수요일 오후 문자한통이 왔는데 임근준 평론가의 강연과 함께 페기 구겐하임 다큐멘터리를 19일 저녁에 상영한다 였습니다. 임근준 평론가는 개인적으로 약 10년전 KBS 문화산책 라디오에서 의 용감한 그들 당돌한 미술 이라는 코너를 빠지지 않고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이분의 강연 문자를 보자마자 꼭 참석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원래 수원시 영상 미디어센터는 사람이 그리 많은 상영관이 아닙니다. 게다가 내용도 약간 학구적이여서 사람이 적겠구나 생각하고 들어섰는데, 들어선 순간 바로 드는 느낌은 사람로 꽉 차 있었습니다. 추측하자면 아이파크 시립미술관이 들어서면서 미술에 관심있는 분들의 욕구를 분출할 통로가 가까운 곳에 생겼고 제가 그래서가 아니라고 부정하지 못하는.. 그로 인해 이번 강연에서도 많은 분들이 참석하신 듯 합니다.
결론을 요약하자면, LGBTQ 들은 사회의 탄압의 힘으로 용감한 도전들을 했고(자기들 사이에서 처절한 복수와 함께), 탄압이 줄어들자 그들의 창작욕구들도 식어버려서 현재는 역사의 한 페이지로 넘어가버렸다 입니다.
지금현재 전 시계적인 Me Too 열풍등 사회적인 트랜드가 어떠한 Life cycle을 갖는지를 알기쉽게 그리고 실제 속사정 및착하거나, 이쁘거나, 능력이 좋으면 요절한다. 반대로 성격이 나쁘거나 능력이 없는 사람이 오래산다는 박서보 화백님 이야긴 아니에요 ^^, 실제 인물들의 뒷모습 게이들의 처절한 전투와 삼성리움미술관 언제 가동되나요? 음 이재용 부회장 감옥 안가면.. 등 다양한 예를 통해서 재미있게 전달해주신 정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간단하게 강연에서 들은 내용들을 순차적으로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아르느보와 오스카 와일드
아르느보 미술에서 동성애 미술이 등장하게된 시초는 영국의 오스카 와일드 입니다. 인기있는 여러 작품을 남겼지만 게이라는 이유로 감옥에서 보내졌고 이를 누가 계승하느냐로 게이 미술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페기 구겐하임
영국에서의 페기 구겐하임
현재 미국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아닌, 페기구겐하임 이 만든 콜렉션이 lgbtq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하고 있고 이를 구성하는데 도움을 준 사람이 큐레이터인 프레드릭 히슬러 입니다. 당시 혁신적인 경험주의적 디스플레이를 구현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동선이 복잡하고 자유로운 감상에 방해되는 이유로 현재는 선형적 진화적 디스플레이가 대부분을 이루고 있고, 일부 제품디자인 등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비엔나에서의 페기 구겐하임
여기에서는 아비 바르보르크 라는 유태인에 의해 그녀의 콜렉션이 완성되는데, 이의 후계자가 바로 E.H 곰브리치 입니다. 미국의 젠슨과 함께 서양미술사를 정리하는 데 중요한 역활을 합니다.
예술들은 Mid Carrier Exhibition (중간 회고록적인 전시) 를 통해서 작가의 대표작들이 선정 되고 이들이 부각을 받으면 스타 작가로 도약하는 발판이 됩니다.
한국에서도 백남준 작가와 친분이 있는 대우 김우중 회장으로 인해, 아트선재센터가 들어서고 휘트니 미술관 관장이 채용되면서 해외 및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등용문으로 활용되게 되었고 기타 유사한 젊은 작가를 키우려는 여러 모습들에 의해 한국의 미술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대우가 해체되고, 이재용은 재판중이고..
다다이즘과 초현실 주의
비엔나에서 활동하던 1940년대 주요 미술의 활동중 하나가 초현실 주의 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본류가 아닌 일시적인 유행으로 그치고 말았는데 하나는 유명한 마그리트 와 달리가 벨기에와 스페인등 주류 출신이 아니였다는 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나치의 하켄크로이츠 시절 이들의 상상력을 펼칠수 있는 기회로써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나치식 경례 는 실은 이전부터 올림픽 승리 후 이를 자축하는 용도로써 많이 활용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를 나치가 차용하면서 지금은 모든 분야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상징들과 트렌드가 사라지는 경우는 자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호안미로의 작품에는 비정형적인 도형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이는 무의식의 영역을 상징합니다
페기구겐하임의 콜렉션에 포함은 되었지만 아들인 솔로몬 R 구겐하임이 일부를 팔이서 현재는 훼손된 상태로 남아있습니다
미국의 모더니즘과 잭슨폴락
페기 구겐하임이 중요한 역사가 된 이유중 하나가 잭슨 폴락 의 발견입니다. 당시 엘리트 미술에서 한발 벗어난 반항적 고난의 민중미술 을 구현하였고, 30년대 까지 이어진 민중미술(드로잉 실력이 부족해서라고도 보여지는데)은 40년대 초현실 미술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를 뒤에서 만들어간 사람이 리 캐스너(Lee Krasner) 바로 폴락의 부인 입니다.
그를 신화로 만들기 위해서 East Hampton으로 일부러 이사하는 등 외부와 단절되는 억압을 구현하였고, 모든 작품이 오랜 고뇌끝에 하루동안 폭발하며 그렸다는 이야기를 지어냈지만, 작품을 분석한 결과 사실이 아니였습니다.
이러한 작품들도 페기구겐하임의 콜렉션에 수집되었고, 1938~1947 미국의 모더니즘이 유럽으로 역수출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잭슨폴락의 작품에는 No1의 이름을 갖는 작품이 많은데, 이는 나의 주된 작품의 본류가 이것이다 라며, 최초의 스타일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마다 모두 No1이라는 제목을 붙였고, 대신 구분을 위해서 각각 부제를 다르게 붙였습니다
잭슨폴락의 부흥에 주요한 역활을 한 잡지가 Life 매거진 입니다. 당시 혁신적인 전면 1컷 사진을 다루는 잡지로써 이미지적인 충격이 상당했었고 잭슨폴락의 미술과 함께 이 잡지는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됩니다
한때 마크 톱을 베꼈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당시 마크톱은 주류 작가였고 그의 작품은 앵포르벨 -> 추상주의 -> 한국의 단색화 와 같은 정제된 표현이라는 점에서 폴락의 작품과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하위문화의 주류편입 그리고 LGBTQ
존 미첼, 신디셔먼(사진학 낙제), 에드라 카프카 주니어, 오브리 비어들리등 당시 하위에서 유행하는 Item들을 활용하여 주류로 편입하는 예들은 위의 잭슨폴락 이후로도 여럿 나타납니다. 가까운 현대미술에는 제프쿤스와 같이 하류 키치미술을 활용하여 성장하는 경우까지 이어집니다.
1969년 스톤혁명이 LGBTQ의 사회적 지위상승의 주요한 사건으로 다뤄집니다. 70년대 문란한 모습들은 80년대 레이건 시절 AIDS 공포로 인해 수면 아래로 내려갑니다.
역설적으로 사회적인 탄압이 오히려 개인 작가들에게는 창작욕구로 분출하게 되고, 다양한 예술적인 시도들이 도입됩니다.
그리고 LGBTQ 간의 시기와 질투 또한 처절하게 싸워가면서 주류에 편입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역설적으로 오바마 시절 이들의 탄압이 줄면서 문화적 발전은 줄어드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국에서의 LGBTQ 그리고 예술가들
한국에서도 일부 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생략)
미술가의 전성기는 생각보다 짧습니다. 짧게는 3~5년 길어도 7~10년 입니다. 대부분 초기에 해매다가 Mid Carrir 를 정리하면서 주요한 작품들이 선별됩니다. 이를 통해서 창작욕구를 불태우고 추후에는 자기부정(말년성) 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 말년성 작품들에 대해 전성기의 작품을 부각하는 효과가 있다며 옹호하는 경우도 발견하게 됩니다
LGBTQ도 줄어든 탄압과 함께 트루바다(Truvada)의 출시로 인해, AIDS 의 공포까지 종식하게 됩니다. 즉 그들의 원하던 문한한 성생활도 가능해진 상황으로 변화하게 된 것입니다. 성관계 전 2알 그리고 이틀동안 1알 씩.. 비보험으로 1년 500만원 정도 약값이 드는데, 태국에 가면 2가지 카피본이 있고 이를 사용하면 1달 5만원 약 60만원으로 복용 가능하다는데 난 먹을일이 없다는..
따라서 이들의 창작욕구는 앞으로도 그리 성장하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미술
미술관에서 사회 문제적인 video 를 틀어드는 식의 미술은 (지난달 서울미술관에서도 이런 식이던데요) 80년대 스타일로 사회적 영향력은 줄어들어 벼렸고, 앞으로는 사회속에서 대중과 함께 구현하는 스타일로 변화 발전해 나아갈 것이라고 예측합니다. 정리만 하는데도 1시간 반이 걸렸다 ㅠㅠ